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셸 푸코 (문단 편집) === 미국 활동과 말년 === 푸코는 어느새 유명 인사가 되어서, "저기 푸코가 있다"라고 누군가가 외치면 모든 사람들이 그가 지나가는 것을 보기 위해 몸을 돌릴 정도였다. 그는 알려지고 또 알려져 논문, 신문기사, 현대사의 책들에서 무수하게 그 이름이 언급됐다. 그런 와중에도 그의 투쟁은 계속되어,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정부가 11명의 남녀를 사형시키려고 하자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규합해 직접 스페인으로 가서 기자회견을 하다가 스페인에서 쫓겨나기도 했고, 잠시 신문기자로 변신하여 [[호메이니]]에 관한 기사를 쓰기도 했다. 폴란드에서 쿠테타가 벌어졌을 때는 [[피에르 부르디외|부르디외]]와 함께 성명서를 발표했다. 1970년 이후로는 미국 대학에서도 그를 부르기 시작했다. 버팔로 대학 프랑스어학과가 그를 몇 번에 걸쳐 초청했고, 버클리와 스탠퍼드 대학에서도 강의를 했다. 한 잡지사가 뉴욕에서 주최한 '반-문화' 심포지엄에서는 수천 명의 청중이 몰려들었다. 1980년 10월에 다시 찾은 버클리 대학에서 푸코는 '진실과 주체성'에 관한 강의를 했는데, 이 강의는 캠퍼스에서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강의를 들으러 오는 사람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문을 닫기 위해 경찰이 와서 정리를 해야만 할 정도였다. 그해 11월에는 뉴욕 대학의 초청으로 강연을 했는데, 이 강연을 두고 『[[타임(주간지)|타임지]]』는 두 페이지나 할애하여 이 프랑스 철학자 주변에서 벌어진 '숭배'의 현상을 전하면서 그의 '불투명한' 이론을 빈정거렸다. 그가 유명해짐에 따라,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그의 급진적인 입장을 비난했고, 미국의 공산주의자들은 그의 체계비판적 허무주의를 비난했다. 사람들은 심지어 푸코가 뉴욕 거리의 여성거지들의 존재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다. 푸코는 자기 글에 대한 오독을 교정하기 위해, 또는 신랄한 비난과 맞서 싸우기 위해 미국에 올 때마다 최소한 한 번 이상 자기 작품의 해명 작업을 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분명한 사실 하나는, 푸코의 이름이 강의계획표에 올라가면 수많은 학생들을 불러 모아 원형강의실이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1983년 버클리 대학을 찾았을 때가 그 절정이었다. '자기 숭배'라는 제목의 공개강좌에는 청중이 강당을 가득 메웠는데, 그는 강의실이 아니라 '극장(!)'에서 강연을 해야 했고, 그곳에는 2천 명 이상이 몰려들었다. 푸코에게 있어서 미국은 즐거움 그 자체였다. 그는 동성애 잡지, 신문, 동성애자들의 바와 나이트클럽 등이 번창하고 있는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유를 만끽했다. 마약도 즐겼다. 미국에서 일하는 것도 즐거웠고 육체적 쾌락에서도 행복했다. 그래서인지 80년대 초부터 그는 숨 막히는 프랑스를 떠나 미국에 정착하려는 계획을 진지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총 4권으로 구상한 『성의 역사』가 마무리 교정단계에 있었지만, 1984년 초부터 푸코는 심한 피로감과 미열에 시달렸고, 아마도 어느 순간 그는 자기가 [[에이즈]]에 걸렸음을 알았다.[* 푸코는 1984년 초에 조르주 뒤메질에게 전화를 걸어 "에이즈에 걸린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해 6월 2일 푸코는 자기 아파트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푸코는 곧 병원에 입원해서 다량의 항생제를 맞으며 버텼다. 잠시 건강이 호전되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작업을 계속 이어나갔다. 친구들을 맞이해선 웃고 농담도 했다. 여행 계획도 얘기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그들에게 통보해 달라고 그는 부탁했다. [[질 들뢰즈]], [[조르주 캉길렘]] 등등. 그러나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며칠 만에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다. 6월 25일 오후 1시, 티비와 라디오에서 "미셸 푸코 사망"이라는 AFP의 속보가 나오자 온 언론사 편집국과 문화계는 경악했다. 다음 날 모든 신문들의 머리기사에서는 이 철학자의 죽음을 언급했다. 6월의 이른 아침, 병원 뒤뜰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질 들뢰즈]]는 『성의 역사: 쾌락의 활용』의 서문에 나오는 푸코의 말을 나지막하게 읊었다. "…철학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사유에 대한 비판작업, 바로 그것이 아닐까? 그것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리고 어디까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가를 알아내려는 노력, 바로 그것이 아닐까." 푸코의 관은 6월 29일 오후에 방되브르의 작은 묘지에 안장되었다. 푸코의 어머니가 종교예식을 원했으므로 신부가 간단한 장례미사를 집전했다. 죽기 3개월 전인 1984년 3월 28일, 푸코는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마지막 강의를 했다. 이 마지막 학기에서 그는 자기가 준비한 것을 모두 말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학기는 끝이 났다. 그래서 그는 청강생들에게 짤막한 몇 마디만 말했는데, 이것이 그의 최후의 작별 인사였다. "자, 이 분석 작업에서 여러분들에게 아직도 할 말이 많은데, 하지만, 너무 늦었군요. 고맙습니다." [* 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1926~1984』 박정자 옮김, 그린비출판사, 2012, 3부 9장 예술작품으로서의 인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